중앙대학교와 영국 글래스고 스쿨 오브 아트에서 공부했다. 스페이스 22(2019, 서울, 한국), 일우스페이스(2018, 서울, 한국), 인사아트센터(2009, 서울, 한국), 스페이스 바바(2007, 서울, 한국) 에서 개인전을 했고, SeMA벙커 (2018, 서울, 한국), ArtCentreBeth- anien(2912, 베를린, 독일), Sarahlee artworks(2008, 산타모니카, 미국) 등 여러 그룹전에 참여했다. 
www.kimchunsoo.com

“0840 GMT” Manchester, 2011, Digital Pigment Print, 50x62.5cm

왕십리 주택가 건물 높은 층에 자리한 김천수 작가 작업실. 창밖으로 아파트 단지와 다가구주택, 상가들이 고밀도로 펼쳐져 있다. 작업실 내부는 그 빽빽함으로부터 사뭇 떨어져 아늑하고 기능적이다. 모니터 세 개가 딸린 컴퓨터와 프린터가 주요 위치를 차지한 그곳에서 작업실 주인과 마주앉았다. 검은색 피케셔츠를 입은 김천수 작가는 반소매 아래로 길고 하얀 팔을 드리운 채 글쓴이의 질문에 응답해주었다. 

인터뷰_이근정
먼저 묻겠다. 사진 작업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나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생기는 문제점이나 오류를 찾아내는 것에 관심 있다.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 있는데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 나한테 가장 편한 매체가 사진이다. 동시에 사진이 발전하면서 생기는 오류도 있는데 그것이 사회적 오류의 맥락과도 통한다고 생각한다.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글래스고 스쿨 오브 아트GSA에서 순수미술 석사과정을 밟았다. 학교생활은 어땠나?
글래스고 스쿨 오브 아트 출신 중에는 컨셉츄얼한 작품을 하는 작가가 많다. 터너상 수상자도 많이 배출했다. 마틴 보이스, 마틴 크리드… 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리처드 와이트도 있다. 페인터인데 캔버스 다 없애고 벽에 그리는 작가다. 그런 작업들이 신선하면서도 흥미로웠다. 그런 쪽 공부를 하고 싶었다. 매체를 정해서 한다기보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는지가 궁금했다.

2013년경부터 시작한 작업이 많다. 귀국한 후에 창작욕이 왕성하게 작동했나?
창작욕은 왕성했지만 활동은 왕성하지 못했다 (웃음). 난 원래 기복이 별로 없다. 누가 내 작업을 보고 좋다고 말해도 그런가 보다 하고, 작업 별론데 해도 그런가 보다 한다. 남 얘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작업을 계속하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님의 작품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First as Tragedy, Then as Farce> 얘기를 해보자. 어떻게 하게 됐나?
시리즈 제목은 카를 마르크스가 쓴 문장에서 따왔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책에 나온 것이다. 영국에 있을 때 빈번히 일어나는 테러 사건을 보며 궁금증을 가졌다. 국제사회 문제도 있고, 영국 역사를 보면 잉글랜드가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 같은 지역을 억압하지 않았나. 테러는 그 역사 속에서 발생한다. 테러가 일어난 지역에서 사진을 찍고, HEX 코드 에디터라는 프로그램을 작동시켜 코드의 일부를 바꿨다. 테러리스트의 이름이나 폭발물의 이름을 적어 넣는 것이다. 코드의 위치를 바꿔가며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본다. 그렇게 해서 나온 이미지가 테러를 연상시킬 수 있는 이미지가 될 때까지 하는 거다.

그 시리즈 대표 작품을 컴퓨터 모니터로 처음 봤을 땐 무지개가 연상됐다.
맞다. 그런 반응도 있었다. 작가의 의도를 몰라도 이미지를 봤을 때 흥미로워야 한다. 시각적으로 흥미를 유발해야 그 뒤의 스토리에 도 관심이 갈 것이다. 그게 이미지의 여러 레이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에 레이어가 있으면 그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내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하나도 모르겠는데?(웃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시 제목, 작품 제목은 단서, 실마리다. 작품에 숨어 있는 이야기가 뭔지 찾아보는 과정이 작업을 보는 거다.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걸 보는 거다.

보통 사진 관람자들은 선명함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사진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전통적 믿음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님의 <LOW- CUT> 시리즈는 의도적으로 이미지를 흔들어놓음으로써 관람자의 그런 욕구를 배반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제 작업 중 좀 더 난해한 경우에 속할 것 같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만 해도 컬러풀하고, 이미지도 선명하고, 외국인 것도 드러난다. 그렇지만 <Low-cut>은 흑백이고, 한국인지 외국인지도 모르겠고, 흔들린다. 건물 자체는 성수동에 있는 주상복합아파트다. 그 자리를 재개발한다고 할 때부터 시끌시끌했다. 결국 원주민은 쫓겨나고 고급 주상복합이 지어졌다. 멋진 건물의 밑바탕에 깔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당시 기사나 관련 자료를 찾아, 프린트한 건물 이미지 위에 흰 먹선으로 겹쳐 표현했다.

작가님의 다른 인터뷰를 보면 작가가 사회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내가 워낙 소심하다. 다큐멘터리 작가라면 현장을 뚫고 들어가겠지만 나는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우회적으로 보여줄 방법이 뭐가 있나 생각한다. 작업 안에서 선악 구도가 뚜렷하게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는 구조나 시스템이 어떻게 돼 있나 얘기해야 한다. 벌어지는 현상을 길게 보면 무한반복이다. 테러, 갈등, 협상, 또 갈등….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누가 좋은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인지 가리는 데 관심이 있다. 나는 사건을 중립적인 시선으로 보려고 한다. 노선을 꼭 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불편함을 느낀다. 작업에서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디지털 사진의 어떤 속성이 당신의 마음을 끌어 당기나?
디지털 카메라가 처음 나왔을 때 혁명적인 시기였지 않나. 필름 현상, 인화를 안 해도 되고 메모리카드에 넣어서 바로 포토샵 할 수 있고. 나는 스트레이트하게 찍는 것은 필름이나 디지털이나 큰 차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디지털 이미지를 만드는 기술 자체가 발전하는 것에 관심 있다. 이미지 파일 포맷도 용량을 적게 만들려고 소프트웨어적으로 알고리즘이 개발되는 거나, 이미지 센서에서 화소를 높이려고 개발하는 거나 그런 것에 관심 있다. 새로운 기술이 계속 나오는데 어떻게 달라질까…. 요즘 소니는 감도가 ISO 40만까지 간다고 한다. 깜깜한 밤에도 촛불 하나 있으면 다 찍힌다는 얘기다. 예전에는 못 찍었을 상황에서도 이제는 찍을 수 있게 바뀌었다. 시각적으로 새로운 게 나온다는 것이 재미있다. 그중에 한두 가지가 내 작업으로 연결되고 결과물로 나온다.

카메라는 언제 처음 접했나?
처음 카메라를 가진 게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이모부가 니콘 수동 필름카메라를 주셨다. 당시에는 최신 기술이라고 느껴졌다. 사용법도 잘 몰랐는데 초등학교 고학년 때
특별활동으로 사진부가 있었다. 미술 선생님이 지도하면서 알려주셨다.

서울키드로서 장소나 지역을 바라보는 취향이 있나?
내 취향은 알프스다(웃음). 고성군 간성면 흘리. 시골을 좋아한다. 외진 곳도 좋아하고. <알프스>를 찍기 전에 시골을 찍고 있었다. 영등포 문래동 살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대치동으로 이사 가서 20대까지 쭉 거기서 살았지만, 아버지 고향이 충남 예산 용리다. 장인어른 고향은 경남 거창 오계리고. 그래서 나는 용리, 아내는 오계리를 찍는 작업을 했었다. 그러다가 진부령에 있는 폐쇄된 스키장 알프스 작업도 하게 됐다. 나는 원래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을 힘들어한다. 세 명까지만 괜찮고 넷으로만 넘어가도 많다. 대가족이 다 모여도 힘들다(웃음).

그럼 술도 안 좋아하시겠다?
소주 반 병 정도? 술 먹으면 사람 많고 시끄러우니까 기가 빨린다. 사람 많은 데를 가야 기가 보충되는 사람이 있고, 사람 없는 곳에 가야 기가 보충되는 사람이 있다는데, 나는 후자인가 보다.

슬럼프라고 느낀 때도 있나?
요즘이 슬럼프인 것 같다. 그렇지만 잘 안 된다 이 수준이지 고통 받는 성격은 아니다. 작업하는 친구들을 만나다 보면 작업이 잘 안 된다고 엄청나게 고통 받는 친구들이 있다. 잠깐 쉬면 되지 뭐, 딴 거 해, 알바 해, 이렇게 얘기한다. 엄청 잘 팔려서 떼돈 버는 것도 아닌데 너는 상관이 없어, 그렇게 얘기한다 (웃음).

작가들 중엔 누구와 친하나?
김태동 작가와 친하다. 중앙대 동기다. 정지필 작가도 동기고. 친한 사람 중에 작업하는 사람이 있는 게 심적으로 도움이 된다. 그 밖에 비슷한 또래 작가들은 대충 다 알긴 한다. 사실 작가 나이 마흔 살쯤 되면 남은 사람이 많지 않다. 사진 하는 사람들 외에는 건축가들과 얘기가 통한다. 영국에서 유학할 때도 가장 친한 형이 건축 공부하는 형이었다. 건축가는 예술가 기질이 있으면서도 이성적어야 하는 직종이다. 지나치게 감성적인 스타일은 나하고 안 맞다.

작업 후 시간이 흘러가면서 자리를 잡아간다는 느낌도 드나? 내 작품이 쌓여간다는 느낌….
작품은 그만 쌓여야 할 것 같다(웃음). 어렸을 때는 돈 안 벌어도 된다 생각하고 막무가내로 작업한 거니까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자리가 잡혀가는데도 이러면 오히려 위기의식이 생긴다. 원래 선배 작가들이 이런 말을 했다. 40대 초반이 항상 위기라고.

ALPS #09, 2017, Digital Pigment Print, 130x100cm

ALPS #11, 2018, Digital Pigment Print, 130x100cm

ALPS #02, 2017, Digital Pigment Print, 130x100cm


Low-cut #110, 2020, acrylic ink on archival pigment print, 134 X 101 cm

Low-cut #111, 2020, acrylic ink on archival pigment print, 134 X 101 cm